안희두 경복궁 탐방 3. 군왕이 변복하고 궁궐을 도망친 민족의 치욕

정흥교 | 기사입력 2020/07/29 [08:16]

안희두 경복궁 탐방 3. 군왕이 변복하고 궁궐을 도망친 민족의 치욕

정흥교 | 입력 : 2020/07/29 [08:16]

 


경복궁은 2020424일 방문했는 데, 코로나 19로 정규해설이 없이 자유관람만 하였고 문은 대부분 닫혀 있었으며 관람객이 아주 적었다. 앞에서 말했듯 필자는 역사와는 문외한으로 <궁궐 안내자료><관련 홈페이지>를 바탕으로 경복궁을 관람한 이야기다.   

 

E. 망해가는 조선

 

임진왜란(1592~1598)으로 조선은 200만명이 죽고 10만명이 일본에 끌려갔으며 전 국토를 유린당해 망국 직전까지 몰렸다. 그런데도 조선 왕조는 7년이나 이어진 전쟁으로부터 배운 게 없었나 보다. 만약 있다면 그중에 하나는 백성에게는 추상(秋霜)같았던 양반들이 왜적에게는 허수아비였던 그 양반들이 또 살아나 더 가혹한 지배가 계속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1882년 임오군란 결과로 군대의 훈련은 청나라에 맡겨지고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했다. 1884년 갑신정변과 1894년 동학농민운동 등 조선은 점점 더 혼란스러웠다. 1894624일 발생한 청일전쟁에서 일본은 승리하면서 조선에서 주도권을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1895108(음력 820) 새벽에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는 일본 군인과 낭인 48명을 이끌고 고종과 명성황후의 침소에 난입하였다. 고종에게는 왕비의 폐출조서에 서명을 강요했고, 옥호루에서는 명성황후를 무참하게 살해하였다.

 

일본의 압력에 시달리던 고종은 1896(고종 33) 211일 변복을 한 채 왕태자와 함께 여성용 가마를 타고 몰래 경복궁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한 나라의 군왕이 변복하고 궁궐을 도망쳐 나올 수밖에 없었던 치욕스러운 현장이었다. 이제 경복궁은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었다.

 

 조선 말기를 연상하며 많은 생각을 던져주는 작품이었다.


조선(朝鮮)139285일 건국되었고, 1910년까지(대한제국 포함) 518년 지속한 국가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되었고 통감 정치가 시작되었으며 1907년 군대도 해산되었다. 또한 1909년에는 사법권도 박탈되더니 1910년 국권(國權)마저 피탈(被奪)되었다. 조선은 임진왜란으로부터 318년 지난 뒤인 1910829일 일본에 강제로 병합되었다. 1910년 창덕궁의 흥복헌에서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었다.

 

한 번은 '실수'라지만 두 번은 '실패'이고 세 번은 '무능'이란 말이 있다. 어쩌면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이미 사망 선고를 받은 체제가 250년 넘게 연명하다가 스스로 자연사했다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많단다.   

 

파렴치가 떠올랐다

걸어온 길 되돌아 보며

치욕을 돌에 파면

훈장을 달아주나

망국에 불타버린 자존심

쌈짓돈에 털터리

 

 서울 고종어극 40년 칭경기념비(高宗 御極 40年 稱慶紀念碑) : 고종이 즉위한 지 40년이 된 것과 51세가 되어 기로소에 입소한 것,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의 칭호를 쓰게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1902년 세웠다.


1910(순종 융희 4) 국권을 빼앗은 일본인들은 궁안의 전(殿(누각 등 4,000여 칸의 건물을 헐어서 민간에 방매(放賣)하였다. 1917년 창덕궁의 내전에 화재가 발생하자 경복궁의 교태전·강녕전·동행각·서행각·연길당·경성전·연생전·인지당·흠경각·함원전·만경전·흥복전 등을 철거하여 그 재목으로 창덕궁의 대조전·희정당 등을 지었다. 자선당 자리에도 석조건물이 들어서고 건청궁(乾淸宮) 자리에는 미술관을 지어 궁의 옛 모습을 거의 없앴다. 1915년 조선물 공진회 개최한다는 구실로 90% 이상의 전각이 헐렸다. 1926, 무엇보다 경복궁의 중심 건물인 근정전 정면 앞에 조선총독부청사를 거대하게 신축하여 근정전을 완전히 가려버렸다.

 

조선 초기부터 임진왜란 중 소실될 때까지 197, 고종 때 복구된 후 28년을 합해 225년 동안만 궁궐로 쓰였다. 경복궁은 1867(고종 4) 흥선대원군이 중건할 때까지 275년을 폐허로 남았다. 궁궐로 쓰인 197년보다 잔햇더미로 보낸 기간이 훨씬 길다. 임진왜란 뒤 고종과 순종 외엔 경복궁과 관련 없는 왕들이다.

 

 서울 시청앞 <여보세요> 조형물인데, 사람의 귀 모양이다. 이 조각물 앞에서 30초 동안 하고 싶은 말을 하면 녹음이 돼 시청 안에 있는 시민청에서 들을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시민의 소리에 귀 기울이겠다는 의지로 1억 원이나 들여 201333일 만들었는데, 정작 박원순 서울시장은 20207964세로 북악산 숙정문 인근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바로 전날인 78일 아내와 같이 등산한 곳이다.


F. 해방

 

경복궁은 광복 후 공원으로 개방되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경복궁 안에 남아있던 주요 건물은 근정문·흥례문·신무문·근정전·사정전·천추전·수정전·자경전·경회루·제수각·함화당·집경당·향원정·집옥재·협길당 동십자각 등이 남게 되었으며, 정문인 광화문도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총독부 건물은 해방 후 미군정청 청사로 사용되었고, 1948510일에는 청사 중앙홀에서 제헌국회를 개의하였으며, 1948815일에는 청사 앞뜰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정부종합청사로 활용되다 1986821일부터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19958·15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철거되었으며, 이 자리에 원래 있던 흥례문 권역이 200110월 복원되었다. 광화문도 원래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초등학교때 서울로 수학여행을 왔고 청와대 앞 길을 걸었으니 광화문이 총독부 앞에 재건축된 직후이고, 1982년 정부종합청사로 총독부 건물에 다녀갔다. 1983년 초엔 주차장에 23일 주차하고, 박물관도 몇 차례 다녀갔다. 철거 직전엔 기념으로 또 다녀가고, 그랬어도 아마 광화문과 흥례문, 근정전 등 극히 일부분만 다녀간 것 같다. 사진을 찾지 못해으니 쓸쓸한 바람만 분다.

 

아참, 조선 왕가는 어찌 되었을까?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되고 순종이 황제로 등극했고 순종의 동생인 이은(영왕 1897~1970)은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11세의 황태자는 일본에 볼모로 끌려갔으며, 1920년 왕녀 마사코(한국식 이름 이방자)와 혼인하였다. 1926년 순종 사망 후, 영왕 이은은 일본에 의해 영친왕이라는 호칭을 얻었지만,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1945년 해방 후, 일본에 억류돼 있던 영친왕은 귀국하려 했으나 그의 정치적 영향력을 경계한 미국 군정과 이승만의 반대로 저지당했다. 이승만 정권은 왕족의 왕실 재산과 개인 물품까지 강제 국유화했고, 왕가 친인척을 왕궁에서 쫓아냈다.

 

국적마저 얻지 못했던 영친왕은 1963년 귀국길에 올랐는데, 뇌혈전증으로 곧 혼수상태에 빠졌고 고독한 투병 생활을 하다가 73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국권침탈 후 일제로부터 많은 금품을 받은 고종과 왕실은 해방 후 국민에게 존재감이 사라졌다.

 

 곳곳에 복원공사 중


한편, 일제에 의해 피해를 당한 경복궁을 복원하는 공사가 1991년부터 침전·동궁·흥례문·태원전·광화문 등 5개 권역으로 나누어, 20년에 걸쳐 5단계로 진행되었다. 이로써 고종 당시 지어진 건물의 40%가 복원되었다.   

 

G. 영추문으로 경복궁 입장

 

경복궁을 어떻게 돌아볼까? 광화문으로 입장을 해 신무문까지 올라갔다가 육상궁을 보고 다시 입장해서 둘러보며 내려오면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해서 사전에 전화했는데, 안된단다. 궁에서 나가면 다시 입장권을 구입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광화문으로 입장을 하려고 육상궁에서 경복궁 담장을 따라 효자로로 내려오다가 활짝 열린 영추문에 문의하니 통합관람권이 있기에 입장할 수 있다고 하여 아무 생각 없이 입장했다. 순간 내린 결론은 경회루를 보고 평소 걸어본 적이 없는 북쪽 태원전을 향해 담장을 따라 올라갔다가 북쪽에서 광화문 쪽으로 ㄹ자로 내려올 예정이다. 탐방기를 쓰면서 다시 생각해보니 무지의 극치였다. 무엇보다 동선을 내 마음대로 정해 날아다닐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영추문 궁 안에서 궁 밖으로 모습


G-1 경복궁의 4대문

경복궁에는 담장(簟匠)과 네 개의 큰 문이 있다. 1433(세종 15)에 북쪽에 문을 완공하여 경복궁의 4대 문이 완성되었다. 석축을 높게 쌓고 중앙에 홍예문(虹霓門)을 터서 문루(門樓)를 얹은 성곽문(城郭門)과 같은 구조였다. 바깥을 두른 담장의 길이는 2,404m에 달하고, 평균 높이는 5m, 두께는 2m 정도이다. 담장의 사방에는 4대문을 만들었고, 1426(세종 8)에 건춘문(建春門-), 광화문(光化門-), 영추문(迎秋門-), 신무문(神武門-)이라 이름 붙였다. 이는 각각 봄-여름-가을-겨울을 상징한다.

 

 영추문에서 경복궁을 들여다본다.

 

남문인 광화문은 정문으로 웅장하고 화려하며 남대문과 함께 극치를 이루는데 북문인 신무문은 평상시에는 통행하지 아니하고 오직 임금이 참석하거나 특별한 경우에만 출입을 허락하는 곳이다. 영조가 칠궁을 다닐 때 주로 이용했다고 앞에서 말했었다. 동쪽 건춘문은 종실, 외척, 부마, 여자 관리 등이 출입하던 문이다. 이에 비해 영추문은 서문으로 일반 관리들이 출입하던 문이었다.

 

G-2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建春問)

경복궁의 동쪽 대문으로 만물의 기운이 움트는 봄이 시작된다는 뜻이 있다. 건춘문은 주로 세자와 동궁 영역에 있는 각사에서 일하는 신하들과 친척, 외척 등이 출입하던 문이다. 현재의 문은 고종 2(1865) 경복궁 중건 당시 건립된 것이다.

 

 건춘문 성 밖에서


G-3 경복궁 서문인 영추문(迎秋門)

경복궁의 서쪽 대문으로 가을을 맞이한다는 뜻이 있다. 건춘문과 대비되는 개념의 이름으로 서쪽 방위의 개념에 맞게 지었다. 이 문은 주로 문무백관이 출입하던 곳으로 특히 서쪽 궐내각사에 근무하던 신하들이 많이 이용하였다. 1975년에 원래의 자리에서 약간 위로 이동하여 지금의 성문을 콘크리트로 복원하였다. 그래서 원래 건춘문과 영추문은 동서쪽에 나란히 있었는데, 이제는 50m 차이가 난다.

 

 영추문을 복원하며 원래 위치보다 50m 정도 위에다 지었다.


G-4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神武門)

신무문은 집옥재의 서편에 있는 경복궁의 북쪽 대문이다. 신무문은 궁성의 북쪽 문으로 북쪽을 관장하는 현무에서 따왔고, 신무문의 천장에는 현무가 그려져 있단다.

 

궁성이 마련되고 나서 1433(세종 15)에 건립되어 경복궁의 4대 문이 모두 갖추어졌다. 신무문은 신묘하게 뛰어난 무용으로 풀이되며 음기가 강하다는 이유로 평소에는 닫아두었다가 비상시 또는 왕의 비밀 행차 때나 사용하였다.

 

신무문 쪽은 인적이 드물었으나, 신하들의 공훈을 기록해 놓은 회맹단이 있어 왕이 공신들의 충성을 다짐하는 모임이 있는 회맹제에 참석할 때에는 이 문을 이용하였단다. 또 영조는 숙빈 최씨를 모신 육상궁에 참배할 때 신무문을 자주 이용하였다.

 

또한 신무문은 건춘문과 규모가 같으며 임진왜란 때 경복궁과 함께 소실되었으며, 현재의 문은 경복궁 중건 시(1865) 현재의 모습으로 중건되었다. 20079월 말 집옥재와 신무문이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신무문


G-5 경복궁 월문(月門)

경복궁의 4대문이 아니면서 궁궐과 통하는 두 개의 월문(月門: 벽돌로 만든 둥근 아치형 문)이 있다. 신무문에서 동쪽으로 향해첫 번째 문이 계무문이고 다음이 광무문이다. 이 문들은 1867(고종 4) 경복궁이 중건될 때 만들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청궁에서 쉽게 밖으로 출입하기 위해 만든 것 같다. 건청궁 동쪽이 광무문, 서쪽이 계무문으로 편액(현판)은 돌에 직접 새긴 금석문이다.

 

 1867(고종 4) 경복궁이 중건될 때 만든 월문(月門)인 계무문(癸武門

 

 돌에 직접 새긴 계무문 현판

 

 1867(고종 4) 경복궁이 중건될 때 만든 월문(月門)인 광무문(廣武門)

 

 돌에 직접 새긴 광무문 현판


G-6 그 밖에 문

경복궁에 또 다른 문들로 동십자각 근처 주차장 출입문(경복궁 출입문), 경복궁 동쪽 중앙에 국립민속박물관 출입문, 그리고 서쪽 하단부 국립고궁박물관 출입문이다. 또 있다. 서쪽 담장과 남쪽 담장이 만나는 곳(서십자각 표지석 근처)에 이래서는 안 되는 쪽문이 있다. 또 하나 아주 큰 문이랄까 통로랄까? 경복궁역 5번 출구가 국립고궁박물관 옆구리에 붙어있다.

 

 국립민속박물관 입구, 궁궐 담장이 안으로 들어가 있다. 이곳은 1927년 일제강점기에 광화문이 축소 이전되었던 곳이다. 이후 6·25전쟁 때에는 폭격을 맞아 불타 소실되었다.

 

 경복궁역 5번 출구 표지판이 왼쪽 중앙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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