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 경회루
영추문으로 들어와 첫 번째로 마주친 것이 경회루(국보 제224호)였다. 경복궁 경회루는 창건 당시(1395년 태조 4) 서쪽 습지에 연못을 파고 세운 작은 누각이었다. 태종이 1405년 개성에서 한양으로 다시 천도한 후, 누각이 기울자 수리를 지시했고 1412년에 경회루(慶會樓)를 크게 완성했다. 태종이 경회루를 만든 까닭은 왕과 신하가 함께 만나서 회의도 하고, 회식도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공사의 총감독은 박자청이 맡았다. 노비 출신으로 공조판서, 의정부 참찬까지 승진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경회루는 근정전, 종묘 정전과 함께 조선시대 3대 목조건물로 단일평면으로는 가장 크다고 한다.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건축 미학의 절정인 경회루는 경복궁의 꽃이라는 유홍준 교수님의 글에 큰 박수를 보낸다.
경회루는 앞면이 7칸, 옆면이 5칸으로 기둥은 48개인데, 이는 24절기(節氣)를 의미한다. 또한 내진은 12칸으로 일 년 12달을 상징하고 외진은 24개 기둥으로 24시간을 상징한다고 한다. 사각기둥은 삼단 높이로 되어 있다. 바깥쪽에는 사각형 기둥을, 안쪽에는 원형 기둥을 사용했다.
연산군(조선 제10대, 재위 : 1494~1506)때 경회루는 왕의 놀이터였다. 전국의 아름다운 여성을 선발해 운평이라는 기생을 만들었는데, 이들 중 궁궐로 뽑혀온 기생을 흥청이라하였다. 연산군 경회루에 붉은 비단 장막을 치고 연못에는 각종 배를 띄워 흥청들과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기생과 어울려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왕좌에서 쫓겨났고, 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연산군은 경회루에서 그렇게 흥청들과 놀아나다 망했다 해서 백성들 간에 흥청망청이란 말이 생겨났다. 연산군의 처세는 사화(士禍)와 붕당정치, 성추행과 방탕 등으로 일어난 중종반정으로 폐왕이 되었고, 국난으로 국운은 쇠퇴의 길을 밟게 되었다. 비운의 단종이 1455년(단종 3) 윤 6월 수양대군에게 옥새 넘겨준 곳도 바로 경회루란다.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돌기둥만 남은 상태로 유지되어 오다가 270여 년이 지난 고종 4년(1867) 경복궁을 다시 지으면서 경회루도 다시 지었다. 연못 속에 잘 다듬은 긴 돌로 둑을 쌓아 네모반듯한 섬을 만들고 그 안에 누각을 세웠으며, 돌다리 3개를 놓아 땅과 연결되도록 하였다. 3개의 다리는 해, 달, 별의 삼광(三光)을 뜻한다.
앞면 7칸·옆면 5칸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누각건물에서 많이 보이는 간결한 형태로 꾸몄다. 경복궁 경회루는 우리나라에서 단일평면으로는 규모가 가장 큰 누각으로, 간결하면서도 호화롭게 장식한 조선 후기 누각건축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소중한 건축 문화재이다.
경회루는 불을 억제하기 위하여 연못에 구리로 만든 용 두 마리를 넣었다고 하는데, 1997년 11월 경복궁 경회루 연못을 준설작업 하던 중 용 하나가 하향정(荷香亭) 앞 연못 바닥에서 발견되었다.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 중인데 용은 길이가 146.5㎝, 넓이가 14.2㎝, 무게가 66.5㎏이란다.
높게 쌓은 담장에 굳게 닫힌 출입문에서 그나마 다행이라면서도 경회루에 목맨다
경회루는 근정전과 함께 경복궁을 대표하는 상징건물로 하늘을 품고, 인왕산과 북악산을 또한 끌어와 품에 담그고 누각으로 초대한다. 또한 근정전을 둘러싼 인왕산과 북악산이 경회루의 배경이 되어준다. 1959년부터 그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낚시를 즐겼던 왕손이 있었으니, 이승만(1875~1965, 재위 1948 ~ 1960) 대통령이다. 경회루 북쪽에 작게 보이는 하향정(荷香亭) 주인장이 바로 그였다.
수정전 동쪽에는 장영실(蔣英實)이 자격루를 설치한 곳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지금의 수정전 자리가 세종 때는 한글 창제의 무대가 된 집현전이 있던 곳이다. ‘정사를 잘 수행 한다’는 의미를 담은 수정전은 근정전 서쪽에 4단 월대를 쌓고 장대석 한 단을 더 올린 5단 위에 자리 잡고 있는데, 1420년(세종 2) 집현전을 이곳에 설치하게 되었다. 이 집현전에서 세종대왕은 학사들과 함께 한글을 창제한 것으로 유명하다. 세종이 깜빡 잠이 든 신숙주에게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덮어 준 일화도 바로 집현전이다. 세종 시대 문화의 꽃을 활짝 피운 집현전도 세조가 집권한 이듬해인 1456년 폐지되다.
조선에서 제일가는 성군 성군 좋았지요 뛰어난 수양 재능 넘어서면 망극일까 뼈아픈 태조를 답습하며 천년의 터 반토막
다른 전각들과는 다르게 사방이 탁 트여 주변으로 행각이 없다. 궐내각사(闕內各司)가 있었다고 하나 일제강점기 때 수정전 외에는 다 사라졌다. 궐내각사는 궁궐 안에 설치된 관청들로 왕과 직접 관계가 있는 비서실인 승정원, 서적 편찬을 맡았던 홍문관, 의료기관인 내의원 등 크고 작은 관청들이 근정전 서쪽에 있었다.
경복궁 관련해서 현재까지 그나마 일부라도 제 자리에서 모습을 보존하는 건물이나 문은 앞서 밝힌 근정전, 경회루, 향원정과 더불어 동십자각, 건춘문 정도란다. 목재 건물의 경우는 보존에 한계가 있지만, 너무 적게 남아있어 아쉬움이 많다. 석재건축물임에도 사라진 서십자각이나 영추문은 더 아쉽고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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