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두 경복궁 탐방기 4 태종은 창덕궁에 머물면서도 경회루 중건하다

정흥교 | 기사입력 2020/08/05 [18:03]

안희두 경복궁 탐방기 4 태종은 창덕궁에 머물면서도 경회루 중건하다

정흥교 | 입력 : 2020/08/05 [18:03]

 


경복궁은 2020424일 방문했는데, 코로나 19로 단체 해설과 경회루 특별관람도 중단되고 자유관람만 허가되었다. 말이 자유관람이지 대부분 문은 닫혀 있어 들어가도 겉으로 돌다 나왔으며 관람객이 아주 적었다. 722일부터 예전의 프로그램이 소규모로 진행되고 있다. 닫혔던 문들이 열려 다시 관람하고 여행기를 수정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되지만, 천천히 다녀와서 수정하리라 약속한다. 앞에서 말했듯 필자는 역사와는 문외한으로 <궁궐 안내자료><관련 홈페이지>를 바탕으로 경복궁을 관람한 이야기다.   

 

H. 경회루

 

영추문으로 들어와 첫 번째로 마주친 것이 경회루(국보 제224)였다. 경복궁 경회루는 창건 당시(1395년 태조 4) 서쪽 습지에 연못을 파고 세운 작은 누각이었다. 태종이 1405년 개성에서 한양으로 다시 천도한 후, 누각이 기울자 수리를 지시했고 1412년에 경회루(慶會樓)를 크게 완성했다. 태종이 경회루를 만든 까닭은 왕과 신하가 함께 만나서 회의도 하고, 회식도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공사의 총감독은 박자청이 맡았다. 노비 출신으로 공조판서, 의정부 참찬까지 승진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우측 중앙부근 하향정이 보인다.


박자청은 누각 주변으로 연못을 파고, 흙을 이용해 가산(假山)인 아미산(峨嵋山)을 조성했다. 연못의 크기는 남북으로 113m, 동서로 128m, 4,400여 평이고, 누각은 약 282평이며 깊이는 2m 정도이다. 종묘에 있는 연못을 보면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라는 유가사상에 맞춰서 보통 연못을 사각형으로 하면 가운데 있는 섬은 둥글게 만드는 법인데 이곳은 일단 섬이 세 개인데다 섬의 모양도 직사각형이다. 경회루 건축에서 가장 슬기롭고 경이로운 부분은 연못의 물 순환시스템이란다. 강제순환장치 없이 북악산에서 흘러들어온 물이 전체를 돌아나감으로써 항상 맑은 물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만시문(萬始門)은 경회루 북쪽 담장의 문으로 흥복전의 서편 행각과 통하게 되어 있는데 경복궁을 중건할 때 만든 것으로 보인다. ‘萬始萬物資始’(만물자시)에서 온 말로 만물이 의뢰하여 비롯하다.”란 뜻이란다. 필관문(必觀門)은 경회루 북쪽 담장에 있는 문으로 이 문은 하향정과 연결되어 있다.

 

 자시문(資始門)1782(정조 6) 지어진 중희당(重熙堂)의 서문이었는데, 일제가 중희당을 없애고 후원으로 향하는 길을 만들었다. 근왕파를 앞세워서 개화 정책을 추진하던 명성황후가 구식 군대의 반란(임오군란)으로 상궁으로 변장하여 이 문을 지나 피신했다고 한다.(경회루로 가는 3개의 문 중 가장 북쪽에 있다.)


누각이 완성되자, 태종이 지은 여러 개의 이름 중 하륜은 경회루를 선택하였다. ‘경회라는 것은 군신 간에 서로 덕으로 만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름을 짓자, 태종은 세자인 양녕대군에게 경회루라는 글씨를 쓰게 하여 그것을 편액으로 삼았다. 지금의 현판은 조선 후기 무신인 신관호의 글씨로 바뀌었다. 경회루 2층에도 올라가 본 것 같은데 증거가 없다. 여하튼 다음에 운이 좋아 예약에 성공하여 경회루에 올라가 보고 싶다.

 

경회루는 근정전, 종묘 정전과 함께 조선시대 3대 목조건물로 단일평면으로는 가장 크다고 한다.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건축 미학의 절정인 경회루는 경복궁의 꽃이라는 유홍준 교수님의 글에 큰 박수를 보낸다.

 

 자시문에서 바라본 경회루 북쪽 못과 담장


성종(9, 재위 1469~1494) 때 고쳐 지으면서 누각의 돌기둥을 화려하게 용의 문양으로 조각하였다고 전해지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이후 고종때에 다시 지으면서 지금과 같이 간결하게 바깥쪽에는 사각기둥을, 안쪽에는 원형기둥을 세웠다고도 한다. 1층 바닥에는 네모난 벽돌을 깔고 2층 바닥은 마루를 깔았는데, 마루의 높이를 3단으로 각각 달리하여 지위에 따라 맞는 자리에 앉도록 하였다.

 

경회루는 앞면이 7, 옆면이 5칸으로 기둥은 48개인데, 이는 24절기(節氣)를 의미한다. 또한 내진은 12칸으로 일 년 12달을 상징하고 외진은 24개 기둥으로 24시간을 상징한다고 한다. 사각기둥은 삼단 높이로 되어 있다. 바깥쪽에는 사각형 기둥을, 안쪽에는 원형 기둥을 사용했다

 

 함홍문(含弘門)에서 바라본 경회루 1


추녀마루에 있는 경복궁의 잡상은 뒤죽박죽이다. 중국의 궁궐에 있는 잡상은 황제가 있는 건물은 11, 태자가 거주하는 건물은 9, 그 이외는 서열에 따라 7개 이하로 되어 있다. 그런데 경복궁은 근정전 7, 경회루 11, 자선당 9, 수정전 6, 자경전 4개 등으로 그 서열을 구별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숫자도 중국은 홀수인 데 반해 조선은 홀수와 짝수를 구분 없이 사용하고 있다

 

 경회루 잡상

 

 함홍문(含弘門)은 경회루 동쪽의 문이다. 함홍이란 포용하고 너그럽다는 뜻이다. (경회루로 가는 3개의 문 중 가운데에 있다.)

 

 함홍문(含弘門)에서 올려다본 경회루


조선전기의 학자 구종직(丘從直)은 교서관(校書館)으로 있을 때, 경회루의 경치가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그곳을 가보고 싶어 하다 숙직하는 날 밤 경회루 연못가를 산보하였다. 그러다 갑자기 세종을 만났고 [춘추] 한 권을 줄줄 막힘없이 암송했는데, 다음날 세종은 구종직을 종9품의 말단직에서 종5품의 부교리(副校理)로 유례없는 승진을 시켰다고 한다. 남들은 20년 걸리는 일을 하룻밤에 경회루에서 이루었다

 

연산군(조선 제10, 재위 : 1494~1506)때 경회루는 왕의 놀이터였다. 전국의 아름다운 여성을 선발해 운평이라는 기생을 만들었는데, 이들 중 궁궐로 뽑혀온 기생을 흥청이라하였다. 연산군 경회루에 붉은 비단 장막을 치고 연못에는 각종 배를 띄워 흥청들과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기생과 어울려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왕좌에서 쫓겨났고, 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연산군은 경회루에서 그렇게 흥청들과 놀아나다 망했다 해서 백성들 간에 흥청망청이란 말이 생겨났다. 연산군의 처세는 사화(士禍)와 붕당정치, 성추행과 방탕 등으로 일어난 중종반정으로 폐왕이 되었고, 국난으로 국운은 쇠퇴의 길을 밟게 되었다. 비운의 단종이 1455(단종 3) 6월 수양대군에게 옥새 넘겨준 곳도 바로 경회루란다.

 

 이견문(利見門)에서 바라본 경회루 남쪽 모습(경회루로 가는 3개의 문 중 가장 남쪽에 있는데 어도가 조성되어 있으며 1868년에 만들었다.)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돌기둥만 남은 상태로 유지되어 오다가 270여 년이 지난 고종 4(1867) 경복궁을 다시 지으면서 경회루도 다시 지었다. 연못 속에 잘 다듬은 긴 돌로 둑을 쌓아 네모반듯한 섬을 만들고 그 안에 누각을 세웠으며, 돌다리 3개를 놓아 땅과 연결되도록 하였다. 3개의 다리는 해, , 별의 삼광(三光)을 뜻한다.

 

앞면 7·옆면 5칸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자 모양을 한 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누각건물에서 많이 보이는 간결한 형태로 꾸몄다. 경복궁 경회루는 우리나라에서 단일평면으로는 규모가 가장 큰 누각으로, 간결하면서도 호화롭게 장식한 조선 후기 누각건축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소중한 건축 문화재이다.

 

경회루는 불을 억제하기 위하여 연못에 구리로 만든 용 두 마리를 넣었다고 하는데, 199711월 경복궁 경회루 연못을 준설작업 하던 중 용 하나가 하향정(荷香亭) 앞 연못 바닥에서 발견되었다.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 중인데 용은 길이가 146.5, 넓이가 14.2, 무게가 66.5이란다

 

 왼쪽 담장에 붙어있는 아주 작은 정자가 바로 하향정(荷香亭)이다.


호수 건너 길가에서 바라만 봐도 좋았다

높게 쌓은 담장에 굳게 닫힌 출입문에서

그나마 다행이라면서도 경회루에 목맨다

 

경회루는 근정전과 함께 경복궁을 대표하는 상징건물로 하늘을 품고, 인왕산과 북악산을 또한 끌어와 품에 담그고 누각으로 초대한다. 또한 근정전을 둘러싼 인왕산과 북악산이 경회루의 배경이 되어준다. 1959년부터 그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낚시를 즐겼던 왕손이 있었으니, 이승만(1875~1965, 재위 1948 ~ 1960) 대통령이다. 경회루 북쪽에 작게 보이는 하향정(荷香亭) 주인장이 바로 그였다.

 

 이견문(利見門)대인을 만나봄이 나에게 이롭다.’라는 뜻이다.

 

 이견문(利見門)에서 바라본 경회루 남쪽 못

 

 자시문에서 바라본 경회루 북쪽 1(이견문과 자시문의 문패가 바뀌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내성문(乃成門)은 침전 권역의 서쪽 행각에 있는 문으로 강녕전과 경회루(慶會樓) 사이를 왕래할 수 있는 문으로 내성(乃成)결실을 이룬다라는 뜻이다. 경회루는 아미산 쪽으로 올라갔다가 근정전 쪽으로 내려오면 교태전 근처에서 다시 마주친다.


I. 수정전(修政殿

 

 수정전(修政殿)

 

수정전 동쪽에는 장영실(蔣英實)이 자격루를 설치한 곳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지금의 수정전 자리가 세종 때는 한글 창제의 무대가 된 집현전이 있던 곳이다. ‘정사를 잘 수행 한다는 의미를 담은 수정전은 근정전 서쪽에 4단 월대를 쌓고 장대석 한 단을 더 올린 5단 위에 자리 잡고 있는데, 1420(세종 2) 집현전을 이곳에 설치하게 되었다. 이 집현전에서 세종대왕은 학사들과 함께 한글을 창제한 것으로 유명하다. 세종이 깜빡 잠이 든 신숙주에게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덮어 준 일화도 바로 집현전이다. 세종 시대 문화의 꽃을 활짝 피운 집현전도 세조가 집권한 이듬해인 1456년 폐지되다 

 

 혼천의

 

조선에서 제일가는 성군 성군 좋았지요 

뛰어난 수양 재능 넘어서면 망극일까 

뼈아픈 태조를 답습하며 천년의 터 반토막 

 

 측우기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고종때인 1867년에 수정전으로 중건된 이곳은 관청으로는 드물게 정면에 월대를 두었다. 수정전은 일상 근무공간으로 사용하다가 1894년 갑오개혁 때 본부로 사용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다른 전각들과는 다르게 사방이 탁 트여 주변으로 행각이 없다. 궐내각사(闕內各司)가 있었다고 하나 일제강점기 때 수정전 외에는 다 사라졌다. 궐내각사는 궁궐 안에 설치된 관청들로 왕과 직접 관계가 있는 비서실인 승정원, 서적 편찬을 맡았던 홍문관, 의료기관인 내의원 등 크고 작은 관청들이 근정전 서쪽에 있었다.

 

 앙부일구


궐외각사(闕外各司)는 궁궐 밖에 설치된 관서들로 경복궁의 동쪽 건춘문(建春文)과 서쪽의 영추문(迎秋門) 일대의 궁장 밖에는 궐외각사에 소속된 각종 관청이 궁궐을 빙 둘러싸고 있었단다. 특히 경복궁 동쪽과 안국동 쪽에 있는 각종 관청은 창덕궁과 가교 역할을 했다. 광화문에서 현재의 광화문 사거리까지 세종로 거리는 잘 알려진 6조 관아가 들어서 궁궐과 한 몸처럼 움직였다

 

경복궁 관련해서 현재까지 그나마 일부라도 제 자리에서 모습을 보존하는 건물이나 문은 앞서 밝힌 근정전, 경회루, 향원정과 더불어 동십자각, 건춘문 정도란다. 목재 건물의 경우는 보존에 한계가 있지만, 너무 적게 남아있어 아쉬움이 많다. 석재건축물임에도 사라진 서십자각이나 영추문은 더 아쉽고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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