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두 경복궁 탐방기 9 안채로 침전인 교태전과 사랑채인 강녕전

정흥교 | 기사입력 2020/09/09 [18:44]

안희두 경복궁 탐방기 9 안채로 침전인 교태전과 사랑채인 강녕전

정흥교 | 입력 : 2020/09/09 [18:44]

 

 

R-2 교태전

 

우선 <강녕전과 교태전>의 안내판을 읽어보자.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으로 침전 영역을 이룬다. 사랑채에 해당하는 강녕전은 왕이 독서와 휴식, 신하들과 면담을 하던 곳이고, 안채에 해당하는 교태전은 왕비가 거처하면서 궁 안 생활을 총지휘하던 곳이다. 1918년 강녕전과 교태전을 뜯어 창덕궁으로 옮겨 사라진 것을 1995년 복원하였다.

 

교태전 뒤편에 계단식 화단을 쌓아 아미산을 조성하고, 4기의 장식적인 굴뚝과 관상용 수석들을 배열해 정원을 만들었다. 아미산 정원은 뒷산인 북악의 정기를 침전까지 이어주며, 왕비의 후원답게 은밀하면서도 기품있게 꾸며졌다.(강녕전과 교태전 안내판 전문)

 

 교태전


<탐방기 8>에서 교태전의 뒤뜰에 있는 아미산을 이야기했고 교태전과 강녕전을 함께 설명한 안내 게시판을 방금 소개하였다.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은 아래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앞과 좌우에 작은 행각들로 둘러싸여 있다. 왕비의 침전을 중전 또는 중궁전이라 부르는데, 왕위를 계승할 왕자가 잉태되는 산실이기에 왕조 사회의 근본을 출발시키는 장소라 하여 천지 음양이 잘 어울려 태평을 이루다라는 의미로 교태(交泰)라 이름을 붙였다.

 

 

 교태전과 강녕전 부근 다음 지도


교태전은 왕비의 정침인 중궁전인데 경복궁 창건 당시인 1395(태조 4)에는 없었으나 1443(세종 25) 증축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명종 8(1553)에 소실되어 1555년에 재건했다. 선조 25(1592) 임진왜란으로 다시 소실되어 고종 4(1867)에 다시 건설하였다. 그러나 고종 13(1876) 또다시 소실되었고, 고종 25(1888)에 복구되었다.

 

교태전은 일제강점기인 1918년 창덕궁으로 옮겨 현재의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이 되었고, 현재의 교태전은 1995년에 복원한 것이다. 굴뚝은 고종이 경복궁을 재건할 때 축조한 것이다.

 

 교태전에서 바라본 아미산, 교태전 문에도 그림을 그려 마치 한 폭의 병풍 같다.


교태전 동쪽에 진료를 맡아보았던 원길헌(元吉軒)이 있고 좌측으로는 함홍각(含弘閣)이 있다. 뒤쪽 아미산이 있는 쪽으로는 중전의 산실로 쓰였던 건순각(健順閣)과 여러 건물이 붙어 있다. 원길헌과 함홍각, 행랑은 방과 청, 부엌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상궁, 나인들이 거처하며 중궁전의 시중을 들던 곳으로 추정된다.

 

 

 중전의 산실인 건순각(健順閣)으로 명당 중 명당인데 정작 여기서 태어난 왕은 없단다.


침전 구역은 1차 복원 계획의 대상으로 이미 준공되어 1996년부터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교태전은 강녕전과 마찬가지로 지붕 위에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중전이 거처하는 중궁전은 임금이 찾는 곳인데 임금은 곧 용으로 하나의 건물 아래 용이 둘이 있을 수 없다 해서 용마루를 설치하지 않는다고 해설사는 이야기했다.

 

 

 교태전 뒤뜰에서 앞으로 바라본 양의문(兩儀門)


교태전에 입구는 3문으로 중앙이 왕이 다니던 길이다. 양의(兩儀)양과 음을 의미하는데 하늘과 땅’, ‘남자와 여자라는 뜻도 있다. 또한 공적인 정치 활동이 이루어지는 영역과 왕실의 사적인 거주 지역을 적절하게 나눈다.

 

 

 양의문에서 교태전을 바라보며


안채와 사랑채가

양의문에서 불난다

하늘 위에 땅인 형국

천둥 번개 요란하다

오백 년 공사가 다 망하니

양아들 들라 해라  

 

R-3 교태전의 흠경각과 함원전

 

침전 옆에는 흠경각과 함원전이 있는데 교태전을 보좌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은 경회루 남쪽에 시각을 알려주는 보루각을 세웠으며, 궁궐의 서북쪽 모퉁이에는 천문 관측시설인 간의대를 마련했다. 또한 흠경각을 짓고 그 안에 시각과 4계절을 나타내는 옥루기륜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흠경각과 함원전에 대해서는 경복궁 안내서에 있는 내용을 인용한다.

 

 함원전


흠경각은 농업 발전을 위해 천체의 운행을 이해하고 시간을 정밀하게 측정하고자 했던 왕의 고민과 노력이 깃들어 있는 건물이다. 세종은 1438년에 흠경각 건립을 명하고 여기에 옥루기륜, 앙부일구 등의 시간 측정기구와 천문 관측기구인 간의를 만들어 설치했다. 경복궁 내전 깊숙이 위치해 주로 불사를 하던 함원전도 세종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왕조는 유교 국가인데도 세종을 비롯해 여러 왕과 왕비가 불교에 심취했다는 기록이 실록에 남아 있다. 몇 차례의 소실을 거쳐 1888(고종 28)에 복구되었으나 1917년 창덕궁 대화재 이후 일제가 창덕궁 재건을 위해 뜯어갔다. 현재의 건물들은 1995년에 복원한 것이다.

 

 흠경각(欽敬閣)은 집안에 자동 천문시계인 옥루를 설치했던 건물이다.

 

1438(세종 20) 장영실이 완성한 옥루는 물의 힘을 이용하여 자동으로 움직이면서 시간과 천체현상이 나타나도록 만들었다. 흠경각이라는 이름은 세종이 지었다. 흠경각과 옥루를 만든 경위와 이 장치의 교묘한 작용에 대한 설명은 김돈(金墩)흠경각기 欽敬閣記에 남아 있단다. 이 시설은 성종 때 고장이 나서 수리받은 바 있고, 1553(명종 8)에는 화재로 타버려 다음 해 박민헌(朴民獻) 등을 시켜 복구한 일도 있다. 이후 1592(선조 25)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모두 불탄 이후 복원되지 못했다.   

 

S-1 강녕전

 

이제 경복궁에서 핵심인 강녕전을 살펴보자. 태조실록 태조 4(1395) 107일 정도전이 왕에게 새 궁궐 전각의 이름을 짓고 의의를 써서 올린 내용이란다.

 

새 궁궐을 경복궁(景福宮)이라 하고, 연침(燕寢:임금이 평상시에 한가롭게 거처하는 전각)을 강녕전(康寧殿)이라 하고, 동쪽에 있는 소침(小寢)을 연생전(延生殿)이라 하고, 서쪽에 있는 소침(小寢)을 경성전(慶成殿)이라 하고, 연침(燕寢)의 남쪽을 사정전(思政殿)이라 하고, 또 그 남쪽을 근정전(勤政殿)이라 하고, 동루(東樓)를 융문루(隆文樓)라 하고, 서루(西樓)를 융무루(隆武樓)라 하고, 전문(殿門)을 근정문(勤政門)이라 하며, 남쪽에 있는 문[午門]을 정문(正門:광화문)이라 지었습니다.

 

 강녕전


교태전과 강녕전을 합하면 침전이다. 왕의 침전과 왕비의 침전을 따로 만들어 남북축 선상에 앞뒤로 배치하였다. 왕의 침전은 대침(大寢)인 강녕전과 소침인 연생전, 경성전, 연길당, 응지당 등 다섯 채로 구성되어있다. 강녕전의 동쪽에 생명의 기운을 맞이한다는 연생전(延生殿)이 있고 서쪽에 완성함을 기뻐한다는 경성전(慶成殿)이 있다. 조선 창건 초기에는 연생전과 경성전만이 강녕전을 보좌하는 삼전 형식이었으나 후에 연길당과 응지당이 추가되었다. 연길당(延吉堂)은 연생전 뒤에 있고 강녕전의 부속 건물이다. 연길당과 좌우 짝을 이루는 응지당(膺祉堂)복을 받는 집이라는 뜻으로 1867(고종 4)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복원했다.

 

모든 권력이 왕권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왕족의 번창은 곧 종묘사직의 첫 번째 임무다. 다산왕으로는 태종이 29, 성종이 28, 선조가 25명이다. 가장 많은 부인을 둔 왕으로는 태종과 성종이 12, 중종이 10명이었다. 많은 자녀를 둔 왕비로는 세종 비인 소현왕후가 10남매, 태조비인 신의왕후가 8남매, 태종비인 원경왕후도 8남매 등이다. 후궁이 없는 왕으로는 단종과 현종, 경종이다.

 

 강녕전 내부


조선의 건국과 함께 1395년 경복궁의 창건 때 임금의 침전인 강녕전이 건립되었다. 강녕전(康寧殿)은 경복궁의 내전(內殿)이며 왕과 왕비가 일상생활을 하는 곳이다. 평소 독서와 휴식을 취하는 침전(寢殿)으로 사용되며 때로는 신하들과 은밀한 정무를 보기도 했다.

 

강녕전은 임금의 높은 신분을 상징하기에 지붕에는 용마루가 없다. 정면 11, 측면 5칸의 웅장한 목조건축물이며 4단의 기단이 설치되고 가운데에는 월대를 설치하였다.

 

 서소침(西小寢)인 경성전(慶成殿)

 

 동소침(東小寢)인 연생전(延生殿)

 

 강녕전 잡상


경복궁 창건 때에 제후 3침 제도에 의해서, 연침(延寢)인 강녕전과 서소침(西小寢)으로 경성전(慶成殿), 동소침(東小寢)으로 연생전(延生殿)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65(고종 2)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경복궁을 복원할 때 다시 지어졌다. 동쪽에 생명의 기운을 맞이하는 연생전이 있고, 서쪽에 완성함을 기뻐한다는 경성전이 있다.

 

 

 강녕전 서쪽에 있는 왕의 우물은 왕의 안전을 위해 무거운 돌 뚜껑을 덮어 놓았다. 8면의 모서리의 구멍은 기둥을 꽂아 놓았던 자리다.

 

 함실 아궁이

 

 

사정전의 뒤에서 임금의 침전 구역인 강녕전으로 들어가는 문인 남쪽의 향오문(嚮五門)이다. 향오는 오복을 누린다는 뜻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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