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두 경복궁 탐방기 14 근정전 일곽과 경회루 2층 특별관람

정흥교 | 기사입력 2020/10/14 [21:26]

안희두 경복궁 탐방기 14 근정전 일곽과 경회루 2층 특별관람

정흥교 | 입력 : 2020/10/14 [21:26]

 


15. 근정전 일곽

 

 근정전 박석의 차일 고리는 의례 거행 시 천막이나 그늘막을 설치하기 위해 만들어 놓았다.

 

근정전 앞마당 전정(殿庭) 전체가 박석(薄石)으로 깔려있다. 표면이 거칠게 다듬어진 돌을 자연스럽게 이어 마당 전체를 깔았는데 이는 햇빛이 반사되는 것을 막아 눈부심을 방지하고 박석 사이의 흙빛이 내는 무늬로 인해 단조롭지 않았다. 또한 박석 바닥이 약간 울퉁불퉁하여 가죽신을 신은 신하들이 미끄러지지 않게 하였다고 한다.

 

중앙 어도(御道)를 기준으로 동쪽에는 문반의 품계석(品階石), 서쪽에는 무반의 품계석이 놓여있다. 행사가 있을 시에 양반의 문무백관이 각각 품계석 앞에 서서 의례를 행하였다. 품계는 정전에 가까울수록 높은데, 앞에서부터 정()1, ()1, 2, 2, 3, 3품 순서로 놓고 이후에는 종()은 없고 정4품에서 정9품까지 순서대로 놓았다. 따라서 품계석은 총 24개가 된다. 품계석은정조 때 경복궁 근정전, 창덕궁 인정전, 창경궁 명정전, 덕수궁 중화전에 세웠다.  

 

 품계석과 박석 그리고 회랑

 

월대의 주위를 둘러싼 회랑은 흥례문의 좌우에서 시작해 향오문의 좌우로 연결되면서근정문(勤政門)과 사정문(思政門)의 좌우에도 이어져 직사각형의 회랑은 모두 3개의 영역으로 구분되는데, 근정전의 좌우 회랑에는 동쪽에 융문루(隆文樓)와 서쪽에 융무루(隆武樓)두고 그 북쪽에 동서행각문인 계인문(啓仁門)과 협의문(協義門)을 두었다.

 

 동쪽 용문루

 

 근정전 행각, 근정문 좌우로 44칸이다.


근정전의 전면 좌우 모서리 기둥 바로 앞에는 세발 달린 향로 모양의 청동제 유물이 있는데 이것의 이름은 향로가 아니고 정이라고 한다. 이 정은 왕권을 상징함과 동시에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고 하늘의 복을 받기를 기원하는 상징물이라고 한다. 두꺼운 청동으로 만든 것이어서 1920년대나 거의 100년이 지난 지금이다 달라진 것은 없다

 

 향로가 아니라 정()인데, ()이 있는 왕조만 소유할 수 있다는 권력의 상징물


근정전 월대 위에 놓여 있는 드므는 방화수를 담아두는 쇠 그릇이다. 옛날 사람들은 화재는 불귀신이 놓고 달아난다고 여겨왔으며, 이렇게 드므에 물을 채워두면 불귀신이 불을 내려고 왔다가 드므에 비친 자기 얼굴의 험상궂은 모습을 보고 불귀신이 놀라 달아난다는 뜻을 담고 있는데 주술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목재로 지어져 화재가 잦은 궁궐에 화마가 침입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상징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견해가 많다

 

 드므, 예전엔 많이 봤던 것 같은데, 양쪽 측면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한 개씩 있다.


16. 경회루 2층을 올라

 

경회루 이야기는 안희두 경복궁 탐방기 4 태종은 창덕궁에 머물면서도 경회루 중건하다(http://swinews.com/1312742020.8.5.)에서 자세히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나 2020812일 경회루 특별관람에 참가하여 2층에도 올라가서 해설을 들었기에 추가한다.

 

 경회루 전경(서쪽에서 촬영)


경복궁 탐방기를 쓰면서 문지방이 닳도록 경복궁 카페를 들낙날락했는데, 경회루 특별관람이 재개된 걸 몰랐다. 84일 취침 직전에야 카페를 통해 알고 다음날인 5일날 오전 10시 정각에 12일자 입장권을 신청했다. 그런데 인증 과정에서 동작이 느려 실패했다. 최대 2명까지 신청할 수 있는데, 1회차가 오전 10, 2회차 오후 2, 3회차 오후 4시로 각각 선착순 15명이다. 예약이 모두 마감되었다. 고민하다 30여 분 뒤에 다시 들어가 보았는데 3회차에 2명이 남아있었다. 누군가 중복으로 신청해 반납한 것이다. 관람 후 바로 다음날인 813일 골프가 예약되어 부담은 되었지만 신청 완료되어 출력까지 마쳤다. 날아갈 것 같았다. 821일부터 다시 중단되었으니 복 많이 받았다

 

 경회루 입장을 앞두고 생물방에서 차와 다과로 잠시 휴식


812일 서울시청 인근에서 점심을 먹고 광화문을 거쳐 흥례문, 금천을 지나 근정문을 통과해 근정전 포토존으로 왔다. 동궁과 태원전, 건청궁, 향원정, 자경전(십장생)과 교태전(아미산), 강녕전, 사정전, 소주방과 생물방, 경회루 주변을 다시 관람했다. 올해 탐방기를 쓰며 4번을 왔고, 해설관람과 경회루 특별관람까지 참가했다. 생물방에서 차와 다과를 먹고 경회루를 한바퀴 돌아보았다. 그리고 특별관람을 시작하는 경회루 옆이자 경회루로 건너가는 가운데 다리를 가기 위래 함홍문 앞으로 갔다. 인터넷에서 출력한 접수증을 확인한 후 입장하여 다리를 건너갈 수 있었다.  

 

 경회루 연못 평면도 참고 자료


연못의 규모는 남북 113m, 동서 128m

큰섬은 동쪽 호안에서 9.4m,동서 39.0m, 남북길이가 50.4m

만세산은 남북길이 16.5m, 동서폭 6.2m

두 섬이 서로 16m 간격으로 남북으로 떨어져 있다.

두 섬은 북, , 남 방향으로 34m, 경회루에서 34m

경회루 크기 정면 34.4m, 측면 28.5m, 높이 21.5m

 

 경회루 남서쪽에서 전경

 

 경회루 1층에서 수정전 전경

 

 경회루 2층 동쪽에서 서쪽 방향으로

 

 경회루 2층에서 서쪽 능선을 바라보며

 

4시 정각이 되자 곧바로 안내가 시작되었다. 소요시간은 40분인데 20분은 해설이고, 20분은 사진 촬영할 시간을 준다. 마스크 착용을 일일이 확인한 후 1층에서 설명이 시작되었다. 1층에서 약 5분 정도 경회루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했다.  

 

 경회루 1층 서쪽에서 동쪽으로

 

태조 때는 지하수가 나오는 습지에 작은 누각이었으나 태종 때인 1405년 누각이 기울자 수리를 지시했고, 태종 12(1412) 대폭 확장하여 다시 짓고 경사스런 모임을 갖은 누각이라는 뜻으로 경회루라 하였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탔고 현재 모습은 1867(고종4)에 중건된 것으로 150여년 된 국보 224호란다. 이곳에서 사신 접대와 연회는 물론 과거시험도 있었고 활쏘기도 하였으며, 가뭄 때는 기우제를 지냈는데 효험이 있어 100% 비가 온단다. 왜냐하면 비가 올 때까지 지내기 때문이란다

 

 어도가 있는 남쪽 다리. 사진 위에 좌측과 우측 하단 모서리에 검은 선은 쇠그물 부시의 일부이다.


누각은 1층 기둥 공간은 비워두고 2층은 마루 형식이란다. 그런데 이 곳 1층은 48개의 기둥 중 안에 24개는 둥글고 밖에 24개는 사각형이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 우주관을 적용했다. 2층 마루는 3겹으로 구성되었는데 중심 3칸은 천지인(天地人)으로 왕()의 영역이고, 그 바깥 12칸은 112달을, 가장 바깥의 24개 기둥은 24절기를 의미하는 동양적 우주관을 건축물에 구현했다

 

 2층 누각의 문주방을 넘어 들어가면 중심인 3칸은 천지인(天地人)으로 왕()의 영역을 나타낸다.

 

 왕이 된 기분으로 왕의 영역에 들다.


경회루로 오가는 다리는 3개인데 남쪽부터 해, , 별을 상징하는 일월성신이란다. 이견문(利見門)을 사용하는 남쪽 다리는 어도가 있어 임금이 다니는 다리, 함홍문(含弘門)으로 이어지는 중간 다리는 왕실과 종친이 다니며, 북쪽 자시문(資始門)으로 건너가는 다리는 신하들이 이용했다. 경회루를 관람하는 사람은 가운데 다리를 이용한다. 그리고 북쪽에 있는 다리는 정3품 이상 관리들만 이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경회루와 담장을 연결하는 다리 3, 길이는 9.4m


경회루에서 남쪽에 현재는 수정전이 있지만 세종 때는 집현전이 있었던 곳이란다. 한글 창제와 관련 아무런 안내도 없어 이래도 되나?’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제 2층으로 올라가기 앞서 갖고 있는 물과 과자류 등은 1층에 바닥에 놓고 신발도 슬리퍼로 갈아신고 2층으로 올라가야 한다. 문화재를 보호해야 되기 때문이다.

 

경회루는 정면 7칸 측면 5칸으로 35칸이다. 경회루 바로 앞의 수정전은 정면 10칸 측면 4칸으로 40칸이다. 근정전은 정면 5칸 측면 5칸으로 25칸이다. 칸 수로는 수정전>경회루>근정전이고, 실제 크기는 경회루>근정전>수정전이다.

 

 1층에서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또 하나 있다.


2층에 올라서며 동쪽에 지붕이 꽉꽉 채워지고 물결치는 모습은 북경 자금성을 연상시켰다. 그리고 창문에는 철망이 쳐져 있는데, 새들의 배설물을 막기 위해서다. 새들의 배설물은 산성이기에 건축물을 부식시켰다. 옛날에는 철망 대신에 명주실로 그물망을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부시를 설치하기 어려운 처마 밑의 구석에는 오지창을 꽂았다

 

 경회루 2층에서 가운데 문인 함홍문(홍경각)


동쪽에서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며 설명했다. 살아있는 주변 경치를 네모진 틀 속에 옮겨주는 액자틀 낙양각 덕분에 사방을 그림처럼 감상할 수 있었다. 문을 90°로 들어 올려 사방을 시원하게 하는 분합문(우리말로 월개문), 우리가 무슨 말을 하는가 노려보는 북악산, 마주치는 것마다 감탄사가 터진다. 경회루는 사방을 담장으로 감쌌으나 일제가 모두 헐었는데 동쪽과 북쪽만 2005년에 복원한 거란다. 경회루 남쪽에 집현전이 있었지만 높은 담장으로 경회루를 볼 수가 없어 한밤중에 몰래 나와 경회루를 거닐다 세종을 만나 종9품의 말단직에서 종5품으로 유례없는 승진을 한 구종직의 이야기도 탄생했단다.  

 

 낙양각 속에 북악산과 필자

 

 수정전에서 바라본 경회루 2층 창틀에 낙양각


사자성어 흥청망청을 만들어내며 경회루를 즐겨 사용한 연산군,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으로 추대된 중종, 그러나 첫 번째 왕비인 단경왕후를 왕인 자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비가 된 지 7일 만에 신하들에 의해 폐위시켰다. 왕비의 아버지 신수근은 연산군의 처남이자 중종의 장인으로 중종반정을 거부했기에 살해되었고 역적으로 기록되었다. 죄인의 딸은 왕비가 될 수 없다며 폐위당하고 인왕산 아래 사직골 옛 거처로 쫓겨나 살게 되었다. 중종은 부인을 잊을 수 없어 경회루에 올라 인왕산 기슭을 바라보곤 하였으며, 신씨는 이 말을 전해 듣고 자기가 입던 치마를 경회루가 보이는 바위에 걸쳐 놓았는데, 사람들은 이 바위를 치마바위라 불렀다고 한다.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다.

 

왕자(王子)도 살얼음판 까딱하다 누명 쓰면

하루 아침 역적으로 칼춤 속에 죽는 세상

꿈일까? 남편은 왕이 되고 아비는 살해된다

 

왕비 된지 이레만에 역적의 딸로 쫓겨난다

백척간두 인왕산에 앞치마 펼쳐놓고

오늘도 구중궁궐 님 그리며 할머니는 기도 중

 

 경회루 잡상 국내 최대인 11

 

경복궁의 건물을 살펴보면 추녀마루 끝에 서유기의 주인공인 손오공과 삼장법사의 행렬을 묘사한 조그마한 조각상이 설치되어 있는데 잡상이라고 부른다. 이는 경사진 추녀마루의 기와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고안된 장치라고 한다. 앞에서부터 차례대로 삼장법사, 손오공, 사오정, 저팔계 등인데, 서유기의 일행이 불법을 가지러 천축국에 다녀오면서 모든 사귀를 물리치고 불법을 얻어왔기 때문에 이 건물의 모든 사악한 잡귀를 물리친다고 한단다. 우리에게는 사람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높고 아득한 곳에 있으면서 신비롭고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기 때문에 전각의 위상과 품격을 높여주고 있다.

 

경복궁 경회루가 현재 열한 개로 가장 많고, 근정전·사정전·강녕전·교태전은 각각 일곱 개란다. 그만큼 경회루가 매우 중요한 장소로 여겨지는 곳임에는 틀림없다. 앞으로 이어지는 궁궐도 관심을 갖고 살펴보길 바란다.  

 

 

광화문 광장이 또 어떻게 바뀔까 두려움이 앞선다 

 

멸망하지 않은 왕조

지구상에 있으랴만

경복궁 가시밭길

탄식의 순례였다

오늘은

그때와 비슷하다며

월출봉 개기 일식   

 

세종이 왕으로 결정된 장소도 경회루였던 것이다. 세종은 후에 자신의 자문기구인 집현전도 바로 이 경회루 앞에 두었다.

 

다음 이야기는 대청도 여행기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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