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전은 창경궁의 편전으로 왕이 관리들을 만나 업무 보고를 받고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던 집무실이었다. 궁궐 자체가 동향인데 문정전은 남향으로 정면 네 칸, 측면 세 칸으로 모두 열두 칸이다. 그리고 명정전과 문정전 사이에 복도를 설치하여 비를 맞지 않고 여러 건물을 왕래할 수 있다. 문정전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광해군 8년(1616) 다시 지었고, 현재의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철거되었던 것을 1986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세자는 영특하면서도 무인 기질이 강해 병서도 즐겨 읽고 오묘한 전술도 터득했다고 한다. 또한 힘 좋은 무사들도 움직이기 어려울 만큼 무거운 청룡도와 쇠몽둥이를 15~16세 때 자유롭게 사용할 정도로 기운이 대단했다. 24세 때인 영조 35년(1759)에 『무기신식』이라는 병서도 지었다.
사도세자의 비극은 영조 25년(1749)인 15세 때 영조를 대신해 국사를 대리청정할 때 시작되었다. 영조는 이전에도 무려 5회나 양위 의사를 밝혔다. 세자 나이 4세, 5세, 9세, 10세, 14세 때였다. 대리청정이 시작된 뒤에도 세 번의 양위 파동이 나타났고 영조는 세자가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중록에 의하면 세자가 옷을 입기 싫어하는 의대증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한다. 세자가 부왕을 만나기 싫어서 생겨난 증세였다. 그 후 세자는 수시로 발작했고 제정신으로 돌아오면 몹시 후회하고 그때마다 부왕이 꾸짖으니 두려움에 빠지면서 증세가 더욱 깊어갔다.
문정전 하면 떠오르는 또 한 사람은 연산군이다. 문정전 앞에서 잔치를 벌이며 자신이 직접 북을 두드리고 노래하며 춤을 추기도 했다. 처용무만큼 시를 좋아했던 연산군은 일기에 120여 편의 시가 기록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如何忍頑我傷情(여하인완아상정) 連年四子離如夢(연년사자이여몽) 哀淚千行便濯纓(애루천행변탁영)
종묘사직 영혼이 내 지성을 생각지 않아 어찌 이다지도 내 마음이 상하는지 해를 이어 네 아들이 꿈 같이 떠나가니 슬픈 눈물 줄줄 흘러 갓끈을 적시네. ▲연산군의 시(詩) / 연산군 일기에서
연산군은 타고난 감수성으로 수백 편의 시를 남겼는데 반정 후 모두 없어지고 실록에 100여 편 만남아 있다고 한다. 위의 시는 연산군이 중종반정(1506년 9월 1일)으로 폐하여 강화도에 안치(귀양을 보낸 죄인을 일정한 곳에 가두어 둠)되었을 때 쓴 시다.
연산군의 아내 신씨는 정청궁에, 아들인 세자는 강원도 정선, 창녕대군은 경기도 평택에 유배되었다. 숙의 이씨의 아들 양평군은 충북 제천, 후궁의 아들인 돈수는 황해도 금천군에 유배되었다. 채 열 살도 안 된 연산군의 아들들은 1506년 9월 24일 세자익위사 소속 군관들이 세자를 옹립하려 한다는 역모에 걸려 모두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 아들 4형제가 모두 역모에 얽혀 사사되었다는 소식에 연산군은 식음을 전폐했다. 그는 유배된 지 두 달 후인 11월 6일, 의문의 역질로 31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마감했다.
그런데 한명회의 큰딸, 즉 성종의 왕비 공혜왕후 한씨가 소생 없이 1474년에 19세의 나이로 죽는다. 공혜왕후가 죽을 당시 이미 성종에겐 여러 명의 후궁이 있었는데, 18세이던 성종은 윤기견의 딸이자 연산군의 생모인 윤씨에게 빠져있었으며 매우 좋아했다. 그래서 공혜왕후 한씨가 죽자 그녀를 왕비로 삼았다. 인수대비는 성종의 새 왕비 윤씨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보다 당시 함께 성종의 후궁으로 있던 여인들은 왕비 자리를 두고 경쟁하던 관계로 질투가 날 수밖에 없었다. 윤씨가 왕비가 되고 왕자까지 생산했지만, 그녀는 물론 그녀의 집안도 왕실에서 왕따였다.
윤씨의 폐출과 죽음의 배경엔 시어머니인 인수대비 한씨가 정현왕후를 중전으로 삼기 위안 음모의 결과라고 한다. 연산군은 자신의 어머니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생각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비록 왕비가 되었지만 의지할 만한 변변한 힘조차 없던 한 여인은 집안 좋은 궁중 여인들의 집단 괴롭힘을 당하며 처참하게 죽어갔다. <저작권자 ⓒ 수원인터넷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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