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두 창경궁 탐방 5. 청나라의 울분을 소현세자에게 퍼부은 인조

정흥교 | 기사입력 2021/02/23 [20:14]

안희두 창경궁 탐방 5. 청나라의 울분을 소현세자에게 퍼부은 인조

정흥교 | 입력 : 2021/02/23 [20:14]

 


12. 함양문(咸陽門)

 

창덕궁에서 창경궁으로 가는 유일한 길인 함양문에서 창경궁으로 들어서면 정전과 함께 부속 전각들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한 궁궐처럼 사용했지만, 일제강점기 이후 완전히 별개 구역으로 나뉘어 한동안 같이 관람을 못 했다. 함양문은 1976년도에 제작한 자료에 나타나기 시작했고, 201051일 문화재청에서 두 궁을 함양문으로 연계 관람할 수 있게 했단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연결하는 함양문

 

 함양문에서 바라본 창경궁 풍경 / 바로 앞 건물이 통명전

 

 함양문, 통명전, 양화당, 영춘헌 등


13-1. 통명전(通明殿)

 

통명전(보물 제818)은 성종 15(1484)에 건립되어 임진왜란으로 불에 탄 것을 광해군 때 재건축하였으나 정조 14(1790)에 또다시 화재로 소실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순조 33(1833)에 중건했는데, 우리나라 중궁전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통명전(通明殿)은 창경궁 내전의 중심 건물로 왕비의 침전 겸 임금이 거처하는 편전으로도 사용했다. 남향으로 정면 7, 측면 4칸이며 가운데 3칸은 열려 있고 나머지는 분합문으로 닫혀있다.

 

 통명전


또한 건물 앞에는 넓은 월대를 쌓고 마당에는 박석을 깔아 중궁전의 격을 높였으며 왕비의 침전이기에 지붕은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이다. 통명전은 서쪽의 산자락을 화단으로 처리하고 그 아래에는 연못을 꾸며 건물이 지닌 위상을 잘 보여주고 있기에 보물 제 818호로 지정되었다. 인조는 재위 11, 창경궁 내전 일곽을 중건한 후 10년 가까이 거처했던 창덕궁에서 창경궁으로 옮겨 이곳 통명전에서 머물렀다.

 

인조는 1595(선조 28)에 선조의 아들인 정원군(定遠君)과 구사맹(具思孟)의 딸인 연주군부인 구씨 사이에서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1623313일 서인이 주축이 된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반정군 병사들이 광해군을 잡기 위해 횃불을 들고 침전을 뒤지다 불씨가 튀어 큰불이 났다. 곧 인정전을 제외한 모든 건물에 불이 붙어 잿더미가 되었다. 반정군은 경운궁으로 가서 11년 동안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 김씨에게 옥새를 바치자 28세의 능양군을 즉위시켰다. 인조는 즉위한 후 22개월 만에 광해군이 재위(1608~1623) 중인 15년 동안 명에 바친 은의 총량을 능가하는 은을 명나라에 뇌물로 주고 책봉을 받았단다.

 

 양화당과 집복헌 사이 계단을 오르며 우측에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가 떠올랐다.


반정의 성공에 따른 논공행상에서 이괄은 불만이 있었지만, 변방의 수비 강화에 진력했다. 그러나 16241월 인조에게 이괄이 변란을 꾀한다는 무고로 이괄의 아들을 잡아들이려 하자 반란을 일으켰고, 이괄은 병력 1만여 명을 이끌고 영변을 떠나 곧장 한양으로 진격했다. 그해 211일 이괄은 한양에 입성한 다음 경복궁의 옛터에 주둔했다. 조선 역사상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켜 도성을 점령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또한 이괄은 선조의 열째 아들 흥안군 이제를 국왕으로 옹립하여 두 차례나 조선의 국왕을 옹립한 인물이 되었다. 215일 이괄은 믿었던 부하들의 배신으로 이천에서 목숨을 잃었고, 그때까지 피란처 공주에 머물던 인조는 한양으로 돌아왔다.

 

형제 관계를 요구하던 후금은 1627(인조4)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침략해(정묘호란) 평산까지 함락되자 조정은 강화도로 천도했고 형제국으로 협정했으나, 1636(인조13) 12월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형제의 관계를 군신(君臣)의 관계로 바꾸자고 요구했으나 거부당하자 군사 10만 명을 이끌고 다시 침입해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인조는 도성을 버리고 남한산성으로 도망쳤다. 인조는 그의 재임 중 3번이나 몽진을 해 역대 1위 기록을 세웠다. 인조는 청에 항복하고 삼전도로 나와 얼어붙은 땅바닥에 머리를 찧으면서 군신 관계를 맺었다. 세자는 볼모가 되었으며, 수십만 명의 백성이 노예로 짐승처럼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창경궁과 창덕궁의 경계지역 담장 옆에 있는 향나무로 옛날 수강궁 시절 수강궁 뜰에 심었던 것은 아닐까 추측한다. 꽃은 15년 정도 지나야 피는데, 4월경 암꽃과 수꽃이 따로따로 한 그루에 피며 그 이듬해 10월에 열매가 흑자색으로 익는다고 한다.


인조의 몽진

      

논공행상(論功行賞) 다툼 속에

도탄에 빠진 백성 팽개치고

 

이괄의 난에는 공주로 도망치고

정묘호란엔 강화도로

병자호란엔 남한산성으로 줄행랑

 

머리를 땅바닥에 찧으면서도

백성들은 노비로 힘없이 끌려갔다  

 

소현세자는 1612(광해군 4) 인조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인조반정의 성공과 함께 12세 나이로 원자가 되었고 1625(인조 3)에 세자에 책봉되었다. 1637(인조 15) 2월 소현세자는 병자호란 결과 인질로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갔다. 1644(인조 22) 명나라는 망하고 청나라는 대륙의 주인공이 되었다. 소현세자는 인질에서 풀려나 1645(인조 23) 218일 한양에 도착했다. 8년 만에 돌아온 세자는 1645(인조 23) 426일 정오 창경궁 환경전에서 34세의 나이로 갑자기 죽었다. 인조와 그 추종세력이 소현세자가 오랑캐(청나라) 세계관을 가지고 왔다고 독살한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인조는 역모로 1646229일 강빈의 형제를 곤장을 쳐서 죽였다. 그리고 315일에는 강빈을 사가로 내쫓은 다음 사약을 내렸다. 또한 소현세자의 세 아들은 1647년 제주도에 유배되었는데 그중에 첫째와 둘째는 1년도 못되어 병으로 죽었고 셋째만 겨우 살아남았다. 강빈의 시녀들도 가혹한 고문을 당하며 죽어나갔다.

 

 통명전 뒤쪽 화단


13-2. 통명전이 조선 중궁전 중 가장 오래된 이유는?

 

1917년 창덕궁 중궁전인 대조전에 원인 모를 불이 나서 임금의 집무실인 희정당, 흥복헌과 징광루, 경훈각, 양심합, 흥복헌, 정묵당, 청향각, 옥화당 등이 소실되었다. 조선왕조의 귀중품은 대조전과 징광루, 경훈각과 양심합 등 가까이 붙어있는 창고와 희정당 등에 보관하였는데 불이 갑자기 크게 번져 귀중품은 하나도 건지지 못했단다.

 

이 불로 인해 일본은 경복궁의 중궁전인 교태전을 헐어 그 목재로 창덕궁의 대조전을 지었고, 경복궁의 강녕전을 헐어 그 목재로 창덕궁의 희정당을 지었고, 그 밖의 건물을 헐어 창덕궁의 경훈각과 함원전을 지었으니, 창덕궁이나 경복궁의 중요 건물이 모두 한 번에 수난을 입었다. 이러한 역사가 조선에서 통명전을 제일 오래된 중궁전으로 만든 것이다.

 

 함양문에서 통명전을 내려다본 풍경

 

13-3. 통명전의 지당(池塘)

 

66세 영조가 책봉된 15세의 정순왕후와 가례 때 절을 주고받고 술잔을 나눈 곳이 통명전이란다.

 

20204149시에 창덕궁을 입장해서 후원까지 구경한 후 1220분경 함양문을 통해 창경궁에 입장했다. 한 바퀴 둘러보고 140분경 홍화문으로 창경궁을 나갔다.

 

 처음 마주친 통명전 지당


위의 사진을 보며 처음엔 단순하게 금천이라 생각했다. 며칠 뒤 사진을 정리하며 금천이라 말하기에 아니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무얼까? 통명전을 인터넷으로 검색하며 얼마를 헤매다 물이 말라버린 연못(池塘지당)임을 찾아냈다. 아내에게 물어보니 연못임을 위치와 함께 연못에 동전을 던지지 마세요라는 안내판까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20201117일 일요일엔 12시 정각부터 금천교에서 시작되는 해설 안내를 졸졸 따라다니며 1시간 정도 관람했는데, 함인정 인근에서 주변을 설명하고 창덕궁으로 넘어가는 부분을 설명하고 양화당 옆을 지나 계단으로 올라갔다. 풍기대를 거쳐 춘당지 앞에서 주변을 설명하고 해산했다.

 

뭐에 홀렸나 그렇게 확인하고픈 통명전 지당을 구경할 생각도 못 했고 해설사에게 물음표 하나 날리지 못했다. 창경궁 원고를 정리하며 117일 통명전 지당을 확인하기 위해 창덕궁과 후원, 그리고 창경궁을 다시 다녀왔다. 곳곳에 사진을 찍고 돌아왔는데, 창경궁 통명전부터 렌즈가 오염되어 사진을 사용할 수 없다. 또다시 다녀와야 한다. 그래도 통명전 지당은 20여 장 사진을 찍었으니 다행이다.

 

 

   

통명전 서쪽에 화강암으로 조성한 12.8m×5.2m의 직사각형인 작은 연못이 있다. 연못은 창경궁 창건 당시 통명전과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연못은 장식 위주의 기능과 방화용수 공급처이기도 하다. 물의 발원지는 통명전 서북쪽에 있는 샘물로, 이 물이 돌로 만든 직선으로 된 물길을 따라 흐르다 연못으로 떨어진다. 이때 그냥 떨어지게 하지 않고 입수구를 봉황 부리 모양을 한 석조물로 만들어 물이 곡선을 그으면서 마치 폭포처럼 떨어지게 하여 한껏 운치를 더했다고 한다.

 

 지당엔 2개의 괴석과 오른쪽에 연꽃돌기둥 하나가 있다.

 

 


연못 가장자리에 연잎과 꽃을 조각한 난간 기둥을 세우고 기둥 사이사이에 돌난간을 둘렀다. 길이 6m, 2.5m의 돌다리를 만들어 가로지를 수 있게 했으며 연못 북쪽 한가운데엔 괴석을 2개 놓고, 남쪽엔 앙련대석(仰蓮臺石)을 새긴 돌기둥 하나를 놓았다.

 

성종이 연못에 구리 수통을 설치했다가 사치라는 신하들의 반발에 돌로 바꿨는데, 정작 설치 비용은 석재 수통이 더 비쌌다고 한다. 이 지당은 우리나라의 지당 중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한다.

 

 샘에서 연못까지 물길은 바티칸시국을 떠오르게 했다.

 

 이 통명전의 서쪽에는 연지가 조성되어 있는데, 장대석들을 바른층쌓기하여 장방형의 연못을 만들고 중앙에 돌다리를 놓고 가장자리에 돌난간을 돌렸다. 이 방지의 북쪽에 우물이 있는데 돌로 물길을 만들어 연못의 물을 끌어들였다.

 

 왕비가 사는 곳이라도 경회루를 떠올리는 지당은 분에 넘치는 아름다움으로 향기가 가득하다. 사진의 아랫부분이 물이 솟아나는 샘이다. 통명전 뒤쪽으로 가면 샘이 또 하나 있는데, 영조가 열천(冽泉 : 맵도록 차디찬 샘물)이라 지었다고 한다.


통명전 옆에 연못이 있는 줄 몰랐다. 지난해 3번을 왔는데, 2번와 3번째 방문에서 찍은 사진 속에 있다. 그런데 집에서 사진 한 장 한 장 분석하는 과정에서 금천이 아닌 금천을 보고 인터넷을 검색하여 물 한 방울 없는 연못으로 확인했다. 나는 그렇다 치고 아내는 어떠니까 물어보니 창경궁으로 넘어가는 곳 근처 건물 옆에 연못이라고 자신 있는 대답이라 놀랐다. 실컷 조사하고 현장 사진을 찍으며 글을 쓰는 사람이 까맣게 모르고 헤매던 연못은 크진 않아도 속살까지 드러낸 아름다움은 실로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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