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두 창경궁 탐방 8 창경궁을 다시 돌아보며

정흥교 | 기사입력 2021/03/16 [16:35]

안희두 창경궁 탐방 8 창경궁을 다시 돌아보며

정흥교 | 입력 : 2021/03/16 [16:35]

 


25. 선인문(宣仁門)

 

창경궁의 4대 궁문 중 남쪽 문인 선인문(宣仁門)은 홍화문에서 성곽 따라 남쪽으로 125m 지점에 있다. 이 문은 성종 때 처음 세워졌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광해군 때 재건되지만, 1857(철종 8)에 다시 소실되었다. 현재의 문은 고종 때 재건한 것으로 보인다. 예전엔 동궁(東宮)의 정문으로 조정의 신하들이 주로 출입하였다고 한다.

 

1506년 중종반정 때 연산군이 선인문으로 쫓겨났다. 1701년에는 숙종의 중전인 희빈 장씨가 남편에게 사약을 받고 시신이 되어 나갔다. 또한 1762년에는 영조의 명령으로 사도세자가 28세에 뒤주 속에 갇혀 죽었고, 결국 이 문을 통해 나가는 등 많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문이기도 하다.

 

 선인문(宣仁門)


창경궁의 4대문 중 집춘문을 제외하고 월근문, 홍화문, 선인문이 창경궁로를 따라 거의 일직선 위에 놓여있다. 창덕궁과 하나였다가 분리되며 필요에 따라 뒤늦게 궐문을 세운 것 같다.  

 

쓰라린 가슴으로 창경궁을 다시 돌아보며

창경궁 탐방기를 쓰며 7회로 마치려다 8회로 늘렸다. 꿈자리가 후자를 원하는 것 같다. 2021353시간을 창경궁에서 가슴 아픈 창경원을 그려보며 떠돌았다.

--- 은 본문 내용으로 그림 해설과 혼동을 피하고자 사용하였다.

 

 오늘날 창경궁

 

 해방 후 창경궁을 복원하기 위한 계획도이다. 좌측은 동물사와 놀이터로 현존하는 건물이 없고 홍화문, 명정문, 명정전이 있다. 중앙 상단에 통명전, 양화당, 영춘헌이 있다. 그리고 우측으로 내농포가 있던 곳이 춘당지로 확대하였고 위로 케이블카가 지나갔다.


참고자료 https://somdali-photo.tistory.com/archive/20151027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isterwang&logNo=222223119497  

141811월 세종은 즉위 후 '수강궁'을 지어 태종을 모셨다. 성종 15(1484)에는 세 대비를 모시기 위해 '창경궁'으로 확장했다. 그런데 이미 고려 제15대 숙종(肅宗) 6(1101) 9월에 남경을 수강궁으로 개창(開創)했다는 이야기가 있단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광해군 8(1616)에 명정전, 문정전, 환경전, 인양전, 공사청, 홍화문 등 창경궁을 중건했다. 1623년 인조반정 때 저승전이, 1624(인조 2) 이괄의 난으로 통명전, 양화당, 환경전 등 소실되었다. 인조 11(1633)에 복구한 창경궁은 전각들이 많았고 웅장하며 가장 화려했단다. 23대 순조(純祖) 30(1830)에 큰 화재가 발생해 내전 대부분이 소실되었고 순조 34(1834)에 중건하였다.

 

일제강점기인 1907년에는 명정전과 남북 행랑 및 주요 전각을 고미술품 전시관으로 바꾸고 남쪽의 보루각(報漏閣) 일대에 동물원을, 북쪽 춘당대(春塘臺)에는 식물원을 만들었다. 27대 순종 2(1909) 111일 일제에 의해 창경원(昌慶苑)을 개장하여 창건 5백여년 만에 창경궁은 막을 내렸다.

 

 회화나무 : 영조 38(1762)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역사를 같이한 나무로 사도세자의 비명을 듣고 너무 가슴이 아파 줄기가 비틀리고 속이 완전히 빈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게시글 전문) / 바로 앞에 금천이 우측으로(남쪽) 흐르고 회화나무가 있으며 우측의 문이 선인문이다.

 

 회화나무

 

1909년 개장 때 전시내용은 동물이 72361, 식물 200여종 1,000여주, 유물 약 8,600(골동 및 미술품)이었다. 중요 동물은 백두산호랑이와 타조, 공작 등이고 식물원인 대온실과 물놀이터 춘당지를 확장했다. 원내 풍경은 초라했음에도 불구하고 1909년 연말까지 2개월 동안의 입장객은 16만명이나 되었단다. 당시 입장료는 어른 10(오늘날 값으로 대략 5,000), 어린이 5전이었다.

 

1909년부터 1911년 사이에 창경원에는 벚꽃 2,000주를 심어 밤 벚꽃 구경은 장안의 명소이자, 최고의 데이트 장소가 되었단다. 창경원은 어느덧 흥청대는 장안의 새 명물이 되었다. 1910년 관람객이 11만명에서 192623만명, 193684만명에 달했단다. 일제는 2차 세계대전 종말을 앞두고 창경원의 40여 마리의 맹수와 큰 동물을 독살했다. 해방 후 창경원은 포유류 3165, 조류 72210, 파충류 16, 104281수로 해가 없거나 사육 비용이 덜 드는 것들만 남아있었단다.

 

 회화나무와 느티나무 : 회화나무와 느티나무의 뿌리와 줄기가 뒤엉켜 자라고 있다.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이 살얼음판 같은 궁궐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서 있는 모습이 연상된다. (게시판 전문) 그런데 바라만 보고 지나치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다.

 

 창경궁 남쪽 부근은 놀이터와 동물원 관련 시설이 있었단다.

 

 회화나무는 궁궐에서 즐겨 심던 나무로 선비의 집이나 서원, 사찰 같은 곳에서도 많이 심었다. 옛날 사람들은 회화나무를 집안에 심으면 가문이 번창하고 큰 학자가 난다고 믿었다. (게시판 전문) / 창경궁에 갈 때마다 제 마음도 나무처럼 아팠어요.

 

 향나무는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매개체이자 부정을 씻어주는 나무로 사랑받아 궁궐을 비롯한 사대부의 정원, 유명 사찰, 우물가에도 널리 심었다. 동궐도에서도 보이는 나무로 200년 이상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게시판 전문)


8·15 광복 후부터 6·25전까지 백여 종의 동물과 온실 및 정원식물만으로 유지했지만, 전쟁이 끝났을 때 남은 것은 봄에 피는 벚꽃만 흐드러졌단다. 1954년부터 창경원을 개원하며 재건에 나섰는데, 대한뉴스에 의하면 1957년에는 하마, 백공작 등 9종류의 새 식구가 들어왔고, 1958년에는 밤벚꽃놀이를 재개했단다. 1962년에는 춘당지 위로 15인승 관광케이블카 2대가 도입되었는데(대한뉴스 356) 310일부터 운행을 시작했단다. 케이블카의 높이는 16m이고 운행 거리가 300m인데 총공사비가 3천만 환으로 5년간 시공회사에서 운영한 후 창경원에 기증하는 조건이었다.

 

1968년에는 수용 동물이 139715수에 이르렀다. 1969년 입장권이 어른은 50, 어린이는 30원이었단다. 1970년 서울에서 파는 자장면 가격이 100원이었는데 여담으로 1970년 발행된 10원짜리 구리동전의 가치는 무려 120만 원이 넘는단다. 1963118일 창경원은 사적 제123호로 지정되었고, 19837월부터 복원공사를 위하여 공개를 중단하였다.

 

 확인한다며 점검하고도 돌아오면 또 빼먹은 통명전 뒤 열천(冽泉)

 

 양화당과 집복헌 사이의 계단을 오르면 자경전 터로 일제가 박물관을 세운 곳이지요.

 

 출처 인터넷 자료 <박물관>

일본식 성의 천수각을 모방하여 건축하였으나 1992년 철거했다.

 

 뱃놀이도 하고 케이블카도 있었다는데 상상이 되지 않았다. 인터넷을 검색하다 보니 옛날 사진이 쏟아진다. 글을 쓰기 전에 자료를 모았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워도 글을 마치기 전이라 얼마나 다행인가.


197715일 지금의 서울대공원 설립계획이 확정되어 1978년에 공사를 착공해 1983년에 준공하였다. 이전 작업을 시작해 198451일 동물원이 개장하였고, 1년 후 식물원을 개장하였다. 동물원 개장 나흘 만에 100만 명을 돌파하였단다. ◀ 

 

 우리 궁궐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느티나무는 은행나무와 함께 천년을 훌쩍 넘기며 사는 나무이다. 나이 약 300살 먹은 이 나무는 창경궁의 역사와 함께하였다. (안내판 전문) 춘당지와 창덕궁 후원이 가까이 있는 곳.


창경궁 복원 방침에 따라 궁궐에 적합지 않은 시설을 19848월까지 모두 철거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동·식물원 일부를 남서울대공원에 인계하였으며 1230일 창경궁이란 본래 이름으로 환원하였다. 1986년 창경궁 복원공사를 마치고 823일 개장하였다. 현재 창경궁은 1900년 초의 20% 정도 복원된 것으로 홍화문, 명정문, 명정전만은 광해군 당시의 건물이다. ◀ 

 

 백송 세 그루

 

 일제강점기인 1912년 지금의 율곡로를 개설해 창경궁과 종묘를 단절시켜 놓았는데 지금에서야 터널을 놓아 지상으로 연결하는 공사가 한창이다.

 

창경궁(昌慶宮)에서 창경원(昌慶苑)으로 격하되면서 많은 백성의 볼거리, 아니 동식물의 놀이터로 전락해버린 그때 그 시절만큼 큰 고통과 수난은 없다고 본다. 조선왕조의 위패를 모신 종묘가 율곡로로 창경궁과 끊어졌었다. 이제 끊어진 맥을 이으며 안내게시판에 무어라 쓸지 모르겠지만 창경궁의 치욕스러운 역사도 장소마다 안내를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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