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샘의 덕수궁 탐방 6 일각문과 꽃담 & 날개 없는 광명문

정흥교 | 기사입력 2021/06/03 [10:41]

두샘의 덕수궁 탐방 6 일각문과 꽃담 & 날개 없는 광명문

정흥교 | 입력 : 2021/06/03 [10:41]

 

 


J-2 덕홍전

 

 덕홍전

 

고종이 경운궁을 확장 이전할 때가 명성황후는 죽은 다음이어서 왕비를 위한 침전은 짓지 않고 사당만 옮겼다고 한다. 조선왕조 시절에는 덕흥전은 없었고 그 자리에는 경소전이 있었다. 경소전은 경복궁에 있었는데 1896(건양 1)에 경운궁으로 옮겼다. 이후 명성황후의 빈전으로 사용했고 1897년 국장 이후에는 경효전으로 이름을 바꾼 뒤 혼전으로 활용했다. 1921년 고종의 신주와 함께 종묘에 부묘(祔廟)될 때까지 경효전에서 상례·제례의 모든 의식이 행하여졌다. 이때는 담과 문으로 침전인 함녕전과 영역을 구분했다. 1904년 대화재 이후 경효전을 수옥헌(漱玉軒) 방면으로 옮긴 뒤 1906년 지금의 덕홍전을 짓고 1911년 개조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덕홍전은 덕수궁에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나중에 지어졌다.

 

 덕홍전 내부428-100539

 

덕홍전은 함녕전을 고종의 침전으로 사용할 때 주로 황제가 외국 사신이나 대신들을 만나던 접견실로 쓰였다. 건물은 정면 3, 측면 4칸이며 겹처마 팔작지붕의 단층 건물로 측면에는 좌우 툇간이 있어서 전체의 평면은 정사각형에 가까운 형태로 되어있다. 원래 덕홍전 주위에는 행각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행각 일부만 함녕전 남행각에 연접되어 있다. 내부에는 봉황과 오얏꽃(李花) 문양 등을 화려한 금색으로 장식했다. 이는 대한제국 황실의 문장(紋章)이었다.

 

 문과 문 위에서 서로 연결된 상인방의 목각

 

내부 천장에는 샹들리에가 설치되어 있고 대한제국기에 황실의 문양으로 쓰였던 봉황과 오얏나무 꽃무늬가 금으로 장식되어 있다. 샹들리에의 자주색 전구는 오얏나무 열매를 상징한다. 사방 문 위 상인방(창이나 문 위쪽에 기둥과 기둥 사이를 가로지르는 나무)마다 이씨 왕조와 황실을 상징하는 황금빛 목각 오얏꽃을 붙였다. 오얏꽃 양쪽은 둥글게 말려 뻗어 나가는 덩굴문으로 장식했는데, 마치 용처럼 보이기도 한다. 상인방 장식을 양쪽 끝에서 물고 있는 게 봉황인데 모두 금빛 칠을 한 목각이다.  

 

J-3 일각문과 꽃담

 

건물이 많아서 담을 쌓아 구분할 때 담 사이에 내는 출입문을 중문(中門)이라 한다. 중문 중에서도 아주 작은 것을 일각문(一脚門)이라 하는데. 정관헌의 앞마당에서 바라볼 때 왼쪽 위에서부터 차례로 창신문, 유현문, 용덕문, 석류문이 배치되어 있다.

 

 창신문 : 창신(彰信)은 믿음을 드러낸다는 뜻으로 서경(書經)에서 따왔다.

 

 창신문

 

 유현문 : 유현(惟賢)은 어진 사람만 출입하는 문을 의미하며 서경(書經)에서 따왔다.

 

 좌우로 꽃담이 이어진 유현문은 벽돌로 쌓아 아치형으로 문을 내고, 그 위에 기와를 얹는 형태로 경복궁의 꽃담에 비해 소박하지만, 전통과 근현대의 조화를 고스란히 담은 명품으로 높이 평가한단다.

 

 아치 양쪽에 물고기를 문 학 부조[유현문 앞쪽] / 뒤에는 구름 속을 나는 용의 부조가 있다.


석어당에서 동편으로 넘어가는 담장 가운데 반월형의 유현문이 있다. 고종은 60세에 얻은 딸(덕혜옹주)이 이곳을 드나들 때면 반드시 유현문을 통과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누구든지 이 문을 지나다니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속설이 있기 때문이었단다.

 

유현문은 안과 밖의 모습이 서로 다르다. 바깥쪽에는 유현문이라는 글귀가 진서체로, 좌우에는 물고기를 입에 물고 창공을 나는 학 문양이 장식되어 있지만, 안쪽에는 같은 위치에 운용이 각각 새겨져 있다. 담을 사이에 두고 있는 편전과 침전을 고려하여 무늬를 의도적으로 설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유현문은 전돌을 아치형으로 쌓고 현판 글씨의 좌우에 학(봉황)을 새겨 배치한 홍예문(虹霓門, 무지개처럼 생긴 문이라는 뜻)으로 조형적 감각이 돋보일 뿐 아니라 땅의 높낮이에 따라 담장의 높이에 변화를 준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여기서 전돌은 벽을 쌓는 데 쓰인 돌(흔히 벽돌)로 점토 등 흙을 높은 온도에 구워서 만든 것이다. 아름다운 꽃담 사이로 화려하지 아니하되 범접할 수 없는 기품으로 서 있다.

 

 용덕문 202051094914 : 용덕(龍德)은 제왕의 덕을 의미하며 주역(周易)에서 따왔다.

 

 용덕문

 

 석류문 : 석류(錫類)는 선()을 내려준다는 의미로 시경(詩經)에서 따왔다.

 

 석류문


벽돌, 돌 등으로 아름답게 문양을 만들어 쌓거나 무늬와 색채를 써서 미장한 담장을 꽃담이라 한다. 기와 아랫부분에 길쭉한 직사각형으로 여러 색깔의 전돌을 깔아 쌓은 부분을 꽃담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기와 무늬


지붕 끝 기와의 수막새에 새겨진 것은 봉황, 암막새에 새겨진 것은 용이다. 새로 제작해 설치한 것이라 깨끗하다. 기와지붕을 만들 때 접착제로 진흙을 사용한다. 막새는 진흙이 굳으면서 흘러내리거나 비가 오면 습도 때문에 흘러내리는 걸 막고 마감이 깔끔하도록 기와 끝에 붙인 것을 뜻하며 암수를 구분하여 수막새, 암막새로 나눠 부른다.  

 

 정관헌 근처에서 석어당을 바라보며 가운데 꽃담이 보인다.

 

 함녕전 뒷마당에서 꽃담

 

꽃담은 아래에서부터 기단, 몸체, 지붕으로 구성한다. 기단은 담장의 기저부를 이루는 토대로 화강석을 반듯하게 다듬어 놓은 장대석을 한 단 또는 두 단으로 쌓거나, 같은 크기로 작게 잘라 놓은 사괴석을 여러 단으로 쌓아 조성한다. 몸체에는 주로 전돌을 사용하는데, 전돌은 담장의 높이를 형성하는 구조체이면서 꽃담의 문양을 표현하는 장식재로도 사용된다. 꽃담의 상부는 한옥과 마찬가지로 기와잇기로 마감하거나, 두툼한 두겁벽돌을 얹어서 지붕을 형성한다. 꽃담의 지붕은 담장 몸체에 우수가 침입하는 것을 방지하며 담장 안쪽 한옥과의 일체감 있는 경관을 형성한다.  

 

J-4 자격루와 흥천사 동종 전시장이 된 광명문

 

광명문은 고종의 침전이었던 함녕전의 남쪽 삼문으로 대한제국 때 건립되었다. 1904년 함녕전의 화재로 궁궐 내 대부분 전각이 소실되었지만, 광명문은 살아남았다. 일제강점기에 덕수궁이 크게 훼손되면서 광명문 좌우에 있던 행각이 철거되었고, 1938년에는 광명문을 중화문의 서남쪽으로 옮겨 홍천사의 동종과 자격루, 신기전기화차를 진열해 문의 기능을 잃고 말았다. 해방 이후에도 그 안에 보루각 자격루와 흥천사 동종 등의 문화재를 전시하였다. 201880여년 만에 제자리를 찾아 함녕전 남쪽으로 옮기고 없어졌던 문과 잡상 등을 복원하였다. 현재 보루각 자격루와 흥천사 동종은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보존 중이다.

 

 2017105일 광명문은 중화문의 서남쪽에서 문의 기능을 잃은 채 신기전기화차와 흥천사의 동종, 자격루가 전시되어 있었다.


흥천사 동종은 조선 세조(世祖) 8년에 태조의 후비 신덕왕후(神德王后)를 추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 후 흥천사는 5층 사리탑만이 남아있다가 중종 5(1510) 3월 탑마저 불에 타자 범종만 지금의 동대문으로 옮겨졌다가 광화문의 종로(鐘樓)로 옮겨졌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다시 창경궁으로 옮겨졌으나 다시 덕수궁의 중화문 서남쪽으로 옮겨졌다. 동종의 높이는 약 2.82m 지름 1.7m 두께 0.3m이다.

 

자격루(自擊樓)는 자동시보장치가 붙은 스스로 움직이는 물시계로 세종 16(1434) 6월에 장영실이 만든 것으로 경복궁 서문인 영추문(迎秋門) 안 보루각(報漏閣)에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가동된 지 20년 만인 단종 3(1455) 2월에 자동시보장치의 고장으로 사용이 중지되고 말았는데, 이는 고장 난 자동장치를 장영실과 공동설계자였던 김빈이 죽은 이후에는 고칠 수 있는 자가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자격루의 규모는 큰 항아리 직경 93.5cm, 높이 70cm이고 작은 항아리 높이 40.5, 수수호 직경 37cm, 높이 199cm이다.

 

이 자격루는 지금 중국 광동에 남아있는 명대(明代)의 물시계보다 제작연대는 조금 떨어지지만, 규모에 있어 세계에서 제일 크고 만든 솜씨도 뛰어나 매우 귀중한 보물(국보 229)로 평가되고 있다. (문화컨텐츠진흥원 자료 참고)

 

신기전은 고려말 최무선이 만들었다. 이를 세종 30(1448)에 개량하여 사용하였다. 세종조에 개량한 신기전은 원통형의 화약통을 부착하여 불을 붙여 발사하는 로켓과 같은 것이었다. 종류는 대신기전, 중신기전, 소신기전, 산화신기전 등 이었으며 소신기전과 중신기전은 위의 사진에서 보이는 신기전기화차에서 발사를 하였다. 사정거리는 소신기전은 100m, 중신기전의 경우는 150m였다고 한다. 또한 제작 당시의 설계도가 남아있는 것 중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위의 사진에서 왼쪽에 있는 신기전기화차의 포문은 남쪽이 아니고 엄연한 황제 침소의 정문이었다.

 

광명문은 덕수궁 권역을 복원하면서 문화재는 반납하고 201812,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행각(行閣)은 복원되지 않아서 문만 홀로 남아있다.

 

 광명문에 잡상만 뚜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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