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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정치인들이 3월을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고 한다. 봄이 왔지만 봄 같지 않다는 말이다. 정치적으로 어려운 시기가 오면 이런 말을 쓴 것이다. 무언가 개선되는 상황이 온 것 같은데 막상 결과를 보면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사실 지난 60여년간의 세월이 “춘래불사춘”의 연속이었다. 독재 체제를 무너뜨리려는 민주열사들이 희망을 가지고 노력하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버리지 않고 노력을 해왔다. “3월”이 “춘래불사춘”의 전형적인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3월‘이 되면 무엇인가 새롭게 될 것 같다는 기대를 가지고 출발을 한다. 동남아시아의 경우에는 3월이 가장 더운 시기라서 방학을 하고, 유럽이나 일본은 4월에 신학기를 시작하지만, 한국에서는 3월에 신학기를 시작한다. 학생이나 학부모 입장에서 3월을 새로 시작하는 달인 것이다. 신 학기를 시작하는 만큼 3월이 주는 신선함과 기대는 대한민국 학생이나 학부모에게는 남다르게 다가오는 것이다. 우리에게 3월이 주는 의미는 단순한 1월과 2월의 다음 달이 아닌 것이다. 희망을 가지고 시작하는, 새 출발을 하는 “달”인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우리에게 3월은 여러 가지 희망을 주거나 충격을 주는 사건을 발생시킨 “달”이었다. 1946년 3월 20일에 시작된 미소공동위원회는 새로운 시작의 기대를 품게 했다. 일본 패망직후 미군과 소련군에 의한 한반도 분할 점령, 그리고 모스크바 3상회의 (전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1945년 12월 16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국, 영국, 소련 외무장관 회의) 결정 후에 좌우익의 극심한 대립으로 해방의 기쁨도 잠시, 민족분단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 한국인들에게 미소공동위원회 개막은 큰 희망을 주는 사건이었다. 미국과 소련이 한자리에 앉고 게다가 그 자리에 한국인의 대표들도 함께 참석시켜 한반도의 미래를 논의하는 장이 된 것이다. 1946년 3월 20일에 열린 미,소 공동위원회에서 소련측은 모스크바 3상회의결정을 지지하지 않는 반탁세력은 임시정부 구성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난항을 거듭하던 미, 소공위는 소련 측이 양보하여 반탁투쟁을 했더라도 이후에 그러한 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서약하면 임시정부에 참가할 수 있다는 방안을 제시했고 이것에 토대를 두어 공동성명 5호가 발표되었다. 이에 임정 주석 김구는 미소공위 공동성명 5호에 서명하지 않았다. 하지와 민주의원 의장대리 김규식은 김구에게 공동성명 5호에 서명할 것을 종용하면서, 서명이 곧 신탁에 찬성하는 것은 아니라는 특별성명 등을 발표했다. 그리하여 이승만, 한민당 측에 이어 김구가 서명에 동의하자 소련측이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였고, 5월 초 미·소 공동위원회는 결렬되었다. 이승만은 서명에 동의하지 않다가 미군정의 압력으로 서명에 동의하게 되었다. 그러나 회의는 끝내 결렬된다. 1946년 5월 19일 이승만은 미소공위에 불참할 것을 공식 성명으로 발표했고, 김규식은 반박성명을 내고 전체 애국자는 적극 미소공위에 참가하라고 공식성명을 발표했다. 그러자 이승만의 측근이던 박용만은 “김규식 박사의 주장에 따른다면 미소공동위에 끝까지 불참을 표명했던 이승만 박사나 김구 선생은 애국자가 아니고 자기만이 애국자라는 어처구니 없는 결론”이라며 비난하였다. 미소공동위원회는 1946년 3월 20일부터 1947년 10월 21일까지 한반도의 임시정부 수립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과 소련이 개최한 회의이다. 개최 초기부터 미국과 소련의 의견차이로 인해 갈등을 빚었으며 아무런 성과 없이 종결되고 말았다. 결국 1947년 10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마저도 성과 없이 결렬되고 해산되었다. 미국이 한반도 문제를 UN 소총회로 이관함으로써 남북의 분단은 가속화 되었고 결국 남한과 북한은 각각 단독정부 수립 확정에 이르게 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 해산이후 한반도의 정부수립 문제는 미국 주도의 국제연합으로 논의의 장이 옮겨졌고 1947년 11월 14일 유엔은 유엔 감시하의 남북총선거를 가결하였다. 그러나 남한에 비해 인구가 적은 북한이 불리하다고 판단한 소련은 결의안을 거부하였다. 이후 1948년 5월 10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위한 총선거가 남한 단독으로 실시되었다. 그러나, 김구 등이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여 불참하였고 제주도에서는 4월 3일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한편, 북조선에서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하여 남북의 분단은 고착화 되었다. 이러한 분단은 결국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의 도화선이 되었다. 통일 정부 수립이라는, 자주 독립 국가 성립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임한 미소 공동위원회의 시작은 3월이었다. 우리 국민들은 36년이라는 일본의 침략 지배에 지쳐 왔기에 이제와 우리만의 대한민국을 설립할 수 있겠구나 라는 희망이 곧 남북분단 고착화라는 절망으로 이어지는데에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러한 희망을 연결시키려는 김구 선생의 노력이 결국 암살이라는 가슴 아픈 결과로 연결이 되고 끝나 버리는, 한국 전쟁으로 이어지고, 후에 남조선 프락치 사건으로 군복을 벗은 박정희가 이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소령으로 복권이 되고, 1961년 5,16쿠데타로 이어지고, 30여년 이상의 군정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역사는 이어지는 것이지만, 그 역사로 인해 후손들은 전혀 새로운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역사로써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 아침에 카톡으로 받은 글귀가 생각나서 간단히 적어본다
“시간의 걸음걸이에는 세가지가 있다. 미래는 주저하며 다가오고, 현재는 화살처럼 날아가고, 과거는 영원히 정지하고” <저작권자 ⓒ 수원인터넷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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